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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대사관 앞

고부운 2013. 2. 12. 05:29

예전에 명동 중국대사관 앞에 일억조(회관?)라는 큰 식당이 있었다. 당시에는 자유중국 대사관이었고 아래 사진에서와 같은 중국전통 건축 양식으로된 이층 높이 정도의 정문이 있었다.


몇 일전 남대문에 들렸다가 명동 그 길을 지나는데 그 일억조회관 자리에는 낡고 초라한 이층건물이 있었다. 화려한 명동에는 어울리지 않는 초라함.

저 제일서림이라는 책방은 한진그룹/대한항공 사옥 건너 대로변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세월지나 여기까지 밀려나 있나 보다. 내가 아는한 최신 외국 잡지를 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책방이었었다.

기억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신당동에 살고 있었는데 여름방학 중 어느 날 어머님이 일억조회관에서의 계모임 점심에 나를 데려 가셨다. 막내 이모도 같이 갔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고기, 갈비를 주종목으로하는 일억조회관은 당시에는 대단히 큰 식당이었다. 계모임을 마치고 어머님, 막내이모는 나를 데리고 미도파 백화점쪽으로 갔다. 그러다가 미도파 앞에서 쯤인가의 인파 속에서 나는 어머님인가 막내이모인가의 손을 놓치고는 순식간에 미아가 되버렸다.

지금도 그 때 상황이 기억나는데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비록 처음 가본 번화가였고 차비 한푼 없었으나 집에 찾아갈 수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신당동, 왕십리에서부터 전차길을 따라서 명동에 왔기에 그 전차길을 되짚어 가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인파 속에서 어머님 찾아 헤매이다 결국에는 포기하고 혼자 집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땡전 한푼 없으니 당연히 걸어서.

당시의 명동, 을지로 입구는 종로와 함께 최고 번화가 였다. 을지로 입구에서부터 신당동까지 아니 을지로4가까지는 각종 신기한 제품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있어서 볼거리가 많았다.

집 찾아 돌아오는 중간 과정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중간에 다리가 아파서인가 파출소에 들어가서 사정 얘기하고 차비를 얻어볼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었던 것 같다. '에이 뭘, 걸을 수 있는데 아쉬운 소리할 필요 없지'하고 그냥 걸었다.

보폭이 작아서 그랬나 이런저런 구경에 정신이 팔려서 그랬나 날이 어두워서야 신당동 집에 도착했다. 당시 여름 방학이었으니까 해가 길어서 8시 이후나 어두워 진다고 보고 또 계모임이 아주머니들 수다 끝에 3시경에나 파했다고 보아도 족히 5~6시간 이상이 걸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집에 도착하니 말그대로 난리가 났다. 경찰에 미아신고는 물론 어머님은 직접 나를 찾다찾다 못찾아서 집에서 초죽음이되어 계셨는데 내가 아무일 없었는듯 쓱 들어선 것이었다.

그 때 어머님 심정이 어떠하였을지는 나도 나중에 내 딸 연지를 3살인가 4살인가에 잃어버려 보아서 잘 안다.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감당하지 못한 공포였다. 군대 때 곧 적군이 쳐들어와 나를 포함한 동료들은 필히 죽는, 살아 남을 가망이 전혀 없는 공격을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는 실탄장전 실제상황에서도 태평하게 라면 끓여 먹고 커피 끓여 마시던 나였는데 자식을 잃어버렸을 때의 공포는 조금만치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공황 상태라는 말이 딱 맞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어머님께 그러한 고통을 드렸다는게 너무 죄송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