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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 - 제515보안부대 : 통보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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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이야기 - 제515보안부대 : 통보리

고부운 2013. 9. 14. 14:13

보안사령부에서 515로 명령이 났다. 사령부에서 515를 통보리 통보리 하고 낮춰 부르지만 아무튼 사령부를 벗어나니 기분이 좋았다. 동기들과 같이 남한산성 근처 언덕 꼭대기에 위치하고 특전사령부와 이웃한 515에 도착 했다. 제길헐 515는 그냥 일반 군부대였다. 보안부대가 아닌것처럼 촌스럽고 군대 스럽다. 권력 기관의 면모를 갖춘 보안사의 특이한 모습에 익숙했던 우리는 다시 전형적인 군부대로 돌아온것이었다. 아~ 이래서 통보리 통보리하는구나 싶었다. 건물들도 전형적인 군부대 형태였고 연병장에 식당건물에 대부분의 장병들은 군복을 입고 근무하는 부대였다. 사복차림은 간혹 눈에 띄였다. 실망이다. 그래도 사병들의 머리는 좀 길었다.

515는 전군의 통신보안을 관장하고 방첩관련 방탐 및 방수 기능을 수행하는 부대였다. 불행스럽게도 나는 515본부 군수과로 배치 되었다. 동기들은 예하대 여기 저기로 배치되어 갔다. 아 제길헐 층층시하 본부에... 여기는 식당밥 질도 사령부보다 많이 떨어졌다.

군수과 과장은 박한ㅅ 소령이었는데 당시 현역 대장 박ㅎ동 장군의 조카라서 그랬는지 말이나 행동에 군더더기 없는 걸걸한 목소리의 호탕한 경상도 사나이 였다. 사무실은 총괄로 신철ㅅ 준위(병들끼리는 '바둑이'라고 불렀다)가 있었고 육군 공군 중사 (너무 자세하다 생략) 등 영외자 가 있었다. 군대생활에서 제일 중요하다는 고참으로는 제대말년의 남기ㅇ 병장과 오세ㅇ, 김진ㄷ 고참 상병, 이상ㄷ상병과 바로 윗고참으로 윤병ㅈ 일병 이 있었다. 이외에 열외 병력 비슷하게 이강ㅎ 병장과 김종ㅂ 상병이 있었는데 이 사람들은 부대전체 급수시설과 보일러 운영을 담당했고 이들은 본부대 내무반 생활을 안하고 따로 시설에 딸려있는 숙소가 있었다. 이들이 군수과 소속이기에 군수과 인원은 정해진 온수샤워 시간 외에도 보일러실에 가서 따듯하게 목욕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바로 윗고참 윤일병은 부산 출신에 사람이 착하고 나랑은 3개월 차이가 나는데 나를 구박하지는 않았다. 그 위는 다 마음에 안드는 고참들이었다. 특히 이상ㄷ상병은 나랑 10개월 정도 차이가 났는데 주사가 있어서 술먹고 들어온 날에는 나와 윤일병을 대상으로 심하게 주사를 부리고는 했다. 군수1,3종을 담당하고 있어서 부천에 있는 삼군지사를 자주 다녀오는데 거의 매번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당시에는 대학교 2년간의 교련훈련과 문무대 훈련기간을 감안해서 군복무기간에서 약 4개월인가를 감해주는 혜택이 있었는데 상고 출신인 이상병이 그 때문에 윤일병과 나를 괴롭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515에 근무하면서 집에는 수시로 드나들었다. 기본적으로 2주에 한번 외박이 주어졌고 군수과 업무상 사령부에 다녀올 일이 있거나 외출이 필요한 업무가 있으면 내가 다녔기 때문이다. 부대가 지금의 송파구 장지동이고 사령부는 경복궁 옆, 집은 그 도중에 있는 신당동 이었으니까 집에 들르기가 딱이었다. 내복 갈아 입으러 집에 들르고는 했다.

515에서 근무하면서 부마사태에 10.26, 12.12 및 광주사태를 겪었다. 그 중에서도 12.12 때는 필히 죽는것으로 생각하고 실탄장전하고 밤을 하얗게 세운 위기였었다. 이 이야기는 따로 쓸 생각이다.

12.12사태를 지나 신군부측에서 권력을 잡아나가고 있는 과정에서 보안사령부는 수도권 일원의 대전복 업무를 대폭 강화했다. 역쿠데타 위험이 있었던거였다. 그 일환으로 515는 본부대 사병의 약 20%를 차출해서 수도권 일원에 재배치 했다. 내가 그 차출인원에 뽑혔다. 그렇게 원했던 예하대 근무지만 막상 차출되고 보니 씁쓸했다. 80년 5월이었는데 내가 그해 11월 제대 예정으로 6개월 남아 있었으니까 딱 제격이었던 것이다. 우리 과에서 내 위 고참들은 제대가 임박 했거나 3개월 밖에 안 남았고 내 밑으로는 쫄병도 3명 받아져 있겠다 내가 차출된 것이다.

덕분에 그 찌질한 515본부대를 벗어나서 남은 군대생활 동안 진짜 '보안대' 비슷한 생활을 해봤다. 1980년 당시의 보안부대는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다.

515에서의 기억

달밤에 체조

한밤중에 술먹고 혼자서 본부건물과 본부대 내무반 건물 통로 위 슬레이트 지붕 위를 왔다갔다 하다가(그 위에서 인디언춤을 췄다나 뭐라나) 슬레이트가 깨지면서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앞니 하나가 반토막으로 부러졌다. 술이 번쩍 깨서는 사무실의 자재창고 키를 가지고 가서 슬레이트를 꺼내다가 감쪽 같이 수리해놓았다. 부러진 앞니에서 신경이 나와서 침도 못 삼키게 무지하게 아팠는데 완전히 달밤에 체조했다. 군수과이기에 아무도 모르게 수리해 놓을 수 있었다. 수리를 못했다면 그 다음날 비상이 걸려서 결국에는 걸렸을 거다. 그 통로는 본부건물과 본부대 내무반 건물 1층에 있는 장교식당을 연결하는 통로였다. 매일 부대장 이하 장교들이 왔다갔다 하는 통로였다. 그 아침에 계단 4개를 한번에 뛰어내리다가 그 충격으로 앞니가 톡 튀어나갔다고 둘러대고 집에가서 치과치료를 받았다.

육군본부 중령 소령들

79. 3월 전두환 소장이 보안 사령관으로 부임해 왔다. 그 여파인지 515 부대장은 기존의 박상ㅎ대령에서 송춘ㅅ대령으로 바뀌었다. 송대령은 육사출신으로 전사령관이 1사단장일때 1군단 통신 참모를 하던 사람이었다. 딱 봐도 매파 전두환 사단이다. 나중에 청와대 통신처장으로까지 따라 갔다. 아무튼 부대장이 바뀌어서 박대령은 육본 무슨 과장으로 갔는데 몇 달후 그로부터 받아올 무슨 서류가 있었다. 나는 그 전날 집에가서 자고 그 다음날 새벽같이 육본으로 갔다. 그 과사무실에 갔더니 소령 중령 둘이 있었다. 용건 이야기하고 박대령이 출근할 때 까지 기다렸다. 소령 중령간 대화가 가관이었다. "XX 중령님, 중령님 내가 알아냈어요. 대걸레를 잘 빨아서 쪽 짜고 그걸 거꾸로 세워 놓고 퇴근하면 냄새가 안나네요." " 어 그래? 다행이다." 아 모냥 빠져도 너무 빠진다. JP는 소령 때.... 우리 부대 소령들은 과장이고 자기 방에 침대도 있고 기관 냄새 팍팍나는 검은색 지프 탑차에 운전병에 따까리도 한명씩 딸려 있다. 조금 있더니 여하사관이 살포시 출근한다. 사무실 청소나 이런 일은 전혀 안하는 모양이다. 그때 알았다. 육본 시집살이가 장교들에게 엘리트 코스 과정중 하나라는데 쫄병 살이 한다는 것을. 나중에 육본에서 군대 생활한 친구 얘기를 들으니까 육본의 사병, 방위들은 별 하나 준장까지는 본체 만체 지나치고 별 둘 소장이나 돼야 경례한다 했다.

보안사령관에게 경례를 안하다

10.26 직후 나는 사령부로 계엄사 발행 야간통행증을 수령하러 갔다. 늘 풍문여고 쪽으로해서 사령부 후문으로 다니고는 했는데 그 날따라 사령부 앞쪽 길로 갔다. 반대편 차선에서 군용짚차가 오고 있었다. 별2개 별판을 달고 있었는데 앞에 캄보이해주는 헌병차도 있었다. 나는 군복을 입고 있었지만 못본척하고 경례를 안했다.그러다가 가만 생각하니 "궁정동 쪽에서 오는 별2개 찦차.!! 옴마니아 사령관 차 같은데... 평소에야 군용 짚차 안타고다니지만 지금은 계엄이고.. 궁정동쪽 궁정동 궁정동....허걱!! 이시간에 저쪽에서 올 2스타는 사령관 밖에 없닷!!!"

전두환 사령관이 보안사에 부임해 오자마자 보여준게 경례에 대한 신상필벌이었다. 자기에게 경례 정확하게 한 사병은 그자리에서 휴가 보내주고 어리버리 민간인마냥 경례 안한 사병은 바로 타부대로 전출보내 버렸었다. 그 짚차를 컴보이하던 헌병 짚차가 U턴을 해서 내쪽으로 왔다. 마음속으로 경악했다. '아쒸 무전으로 저 경례 안한 놈 잡으라고 지시 했나? 치사하게...' 순간적으로 튈까' 생각했지만 골목도 없고 .. '에따 모르겠다. 끝까지 못본척 하자.' 다행히도 헌병차는 나를 지나쳐 사령부 후문 쪽으로 가고 별2 짚차는 사령부 정문으로 들어갔다. 진짜 전두환 보안사령관 차였다. 요즘 표현으로 가슴이 쫄깃해진 순간이었다.


계엄 통금된 거리를 경복궁에서 신당동 집까지 걷다.

사령부에서 야간통행증을 수령해서 부대로 오려는데 통금이 일찍 시작되어 교통편이 끊겨버렸다. 부대로 연락 했더니 그냥 하루 사령부에서 자고 오란다. 조금 있다가 사령부에서 멍하니 있기가 싫어서 신당동 집에 가려고 길을 나섰다. 거리에 일체의 차가 없어서 종로를 따라 그냥 걷는데 종로 도로 곳곳에 수경사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다. 통금이던 말던 수경사 헌병을 무시하고 그 옆을 유유히 걸어 가니까 감히 잡지를 못했다. 그냥 나를 못본척 했다. 속으로 그랬다. '내가 이넘들아 지금 야통증을 수십장 가지고 있으신 분이다 이넘들아' 종로4가 쯤에서 경찰 순찰차가 지나 가길래 신당동까지 데려다 달라고 하려다가 아무도 없는 통금된 거리를 걷는 기분도 묘하고 해서 그냥 집까지 걸어 갔다. 경복궁에서 신당동까지.

시골농가 무쇠솥밥

김장철이 되어서 1.3종계가 성남근처로 배추를 사러가는데 일 없는 내가 따라갔다. 방위병들을 부려서 배추를 따다가 점심 때가 되었다. 그 때 배추농가에서 차려내온 밥상이 너무 너무 맛있었다. 커다란 무쇠솥단지에 짚을 때서 지은밥. 그때까지 살면서 그렇게 맛있는 밥은 없었던것 같다.

군바리가 군바리 면회 가다.

일병 때 어느 토요날 외박을 나갔다가 친구 경돈이랑 불현듯 홍천에서 군대생활하는 성중을 면회 갔다. 나는 그냥 일병 계급장 군복을 입었는데 머리는 길었다. 홍천 버스터미날에 도착하니 군인들 외출 외박이 많은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헌병들이 좌악 깔려 있었다. 내가 모자도 안쓰고 버스에서 내리는데 2인1조 헌병조의 예리한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내가 '뭐! 왜 쳐다보는데?' 하는 식으로 그들을 쳐다보니까 이들이 나와 눈을 안마주치려 머리를 획돌리다가 하이바가 살짝 돌아갔다. 이게 헌병들의 특이한 모습인데 자기들이 못건드릴 것 같으면 아예 못본척 했다. '저건 뭐지? HID인가? 뭐야 저거?' 했겠지. 홍천만해도 전방이었다. 전방에서는 보안대 사병이라고해도 머리를 서울처럼 많이 길게는 못하게 했다. 그러니 홍천 헌병대 입장에서 보면 처음 보는 종류의 군바리 '일병'이었던거다. 머리는 일반인 같고 군복바지는 고무줄도 없이 워카에 집어 넣고 속을 뜯어낸 모자도 구겨서 손에 든 아주 불량스러운 '일병'이 너무 당당하게 나오니까 쫄 수 밖에. 별거 아닌 이런게 굉장히 크게 느껴지는게 군대다. 의기양양 성중이 부대를 찾아갔다. 성중이가 외출을 받아서 같이 홍천시내 식당에 가서 술을 마셨는데 면회간 놈들이 돈이 없어서 성중이가 물건 잡히고 계산했단다. 이 계산 부분은 성중의 기억이자 비난이다. 난 그런 기억 안난다. ㅎ ㅎ ㅎ

해병대의 야성

어느날 당직부사관인 남기ㅂ 해병대 중사가 방위병들 데리고 부대 뒤쪽 밭에서 뭘 캐오는 작업을 나가는데 심심해서 따라갔다. (무슨일로든 밖에 나가는게 좋다. 꼴보기 싫은 고참들을 안본다.) 방위병들이 밭을 파는 중에 작은 새앙쥐 한마리가 나왔는데 남중사가 이 새앙쥐를 잽싸게 손으로 잡아챘다. 잠깐 들여다보더니 이빨로 몸통가죽을 따냈다. 그러고는 아래쪽으로 한번 위쪽으로 한번 손으로 훑어내니까 껍질이 홀랑 벗겨진 빨간 살덩이 새앙쥐가 그 손안에서 아우성을 쳤다. 남중사는 다시 이 새앙쥐를 입으로 끊어서 두토막을 내고는 툇하고 뱉어버렸다. 아 몬도가네도 아니고 제길헐 사람 좋다고 친하게 지냈는데 역쉬 똘끼 충만한 해병대였다. 그 다음부터는 남 중사를 슬금슬금 피했다.

12.12

10.26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이 나고 얼마있다가 12.12사태가 났다. 이 12.12사태 때는 100퍼센트 죽는줄 알았디. 간단히 말해서 특전사 정XX사령관을 우리부대로 잡아오는 바람에 특전사 병력이 곧 쳐들어온다는 상황이었다. 아 쒸 특전사령부에는 장갑차도 있고 개네들 일당백에 밤낮 없이 사격연습 해대는 애들인데, 우리부대 화력이래봐야 개인화기 M16에 위병소 옥상에 꼴랑 기관총 1정. 그때는 정말 꼼짝없이 죽는줄 알았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그 밤에도 난 라면 끓여먹고 커피 마시고 했다. (이 얘기는 따로 한편.)

군수과장 강제 제대

12.12 다음날인지 그 다음날인지 우리 군수과장 박ㅎ식소령이 제대를 당했다. 과장의 삼촌인 박ㅎ동 대장이 신군부 반대측 이라는 죄다. 아 군대 칼이다. 삼촌 조카사이를 연좌로 몰아서 바로 제대시키다니. 날 조금 고이는 것도 같고해서 내가 속으로 따랐는데. 후임으로 이구o 소령이 부임해 왔는데 대단히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이 이소령은 나중에 내가 현대전자에 근무할 때 회사 예비군 대장으로 부임해 와서 다시 만났다. 그 당시 기획실에서 갓 떨어져 나온 우리 사업본부가 서무 여사원을 충원하지 못해서 애먹고 있었다. 그 때 기술기획 담당 과장이었던 내가 관리부서에서도 충원을 못하는 서무 여사원자리에 바로 이천 예비군 본부에 근무하는 여사원 김옥ㅅ을 빼내오는 공(?)을 세웠는데 이때 이소령이 반대를 안해서 도와준것인지 힘이 없어서 뺏긴 것인지 기억이 잘안난다.

합수부 보너스

12.12 이후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이름으로 전 보안사 인원들에게 두 번인가로 나누어서 위로금이라는 명목으로 보너스가 지급 됐다. 급여의 400% 였던가? 사병들에겐 별거 아니였지만 우리부대 부대장이 총 4백만원이 넘게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400은 큰돈이었다. 사령관이 중앙정보부 금고에 있던 장부에도 없는 돈 현찰 12억인가 30억인가를 그냥 가지고 와서 나눠준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나중에 본 여러가지 기사에 의하면 당시 실세 전두환 사령관이 허당 노재현 국방부장관에게 "우리 애들 고생이 많은데 위로금을 좀 줘야되겠습니다." 했고 노장관은 예산 타령을 했고 이에 전이 그건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했다나 뭐라나.

TBC

<515때 부대본부에서 찍은 유일한 군대때 사진... 어디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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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독 아무도 없는 밤길을 혼자 걷기 좋아했다. 학교 다닐때도 방학이면 아직 통금도 안풀린 새벽 3시나 3시반 쯤 신당동 집을 나서서 남산 꼭대기까지 걸어서 다녀오곤 했다. 겨울에는 능선 나무사이로 달빛이 어른 어른거리며 꼭 누군가 나무 뒤에서 나를 보고 있는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나는 그 은근한 두려움까지도 즐겼다. 나중에 한참 관악산에 다닐때는 밤에 혼자 야간 등산도 하고는 했다. 야밤에 혼자 산에 오르면 꼭 나를 따르는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내 발자국 소리의 반향이다.

"전두환은 사람이 어때요?"

현대전자가 PCS 이동통신 사업권을 따오기 위해서 통신분야에서 명망이 있는 분을 부사장님으로 모셔왔었다. 홍성ㅇ 부사장님인데 육사출신에 미국공학박사에 5공때 청와대 경제비서관을 하면서 DACOM을 새로 만들때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등 한때 한국의 통신사업을 쥐락펴락 하던 분이었다. 당시 통신업계의 거물인 오명 전장관과 딱 같은 스펙의 후배셨다. 실제로도 오명 전장관과 가까우셨고, 언젠가는 정통부 장관 한번 할지도 모르는 분이셨다. 당시 우리 사업본부에는 중역분이 부사장님 포함 총 네분이었는데 점심시간에는 이 분들끼리 식당에 가거나 수가 모자라면 차,부장들을 끼워서 4명 정도로 맞춰서 식사를 하곤 했다. 어느날 홍부사장님이 식사를 하러 가시는데 중역이 아무도 없고 차,부장급도 나밖에 없었다. 내가 모시고 식당으로 가다가 신입사원 박규ㅂ이 눈에 뜨이길래 너도 같이 가자 했다. 셋이서 지리를 잡고 밥을 먹기 시작했는데 박규ㅂ 이 녀석이 뜬금 없이 부사장님께 질문을 했다. "부사장님, 전두환은 사람이 어때요?"'아 이쉐리 천둥벌거숭이!!!' 내가 놀래서 녀석을 째려보고는 부사장님 기색을 살폈다. "어? 으흠 으흠 ...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 괜찮은 부분도 있는 분이야" ... 말이 끊긴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내가 말했다. "제가 보안사에서 군대생활 했는데 그때 사령관으로 오셨었습니다. 하하" "그랬나?" 그리고 다른 이야기로.... 나도 속으로 궁금한 게 있었다. 청와대 떠나실 때 전별금 얼마 받으셨는지. 통이 컸다던데...직원들끼리 술마시다 어쩌다 우발적으로 발생한 처리곤란 큰 금액의 영수증을 슬그머니 부사장님실에 밀어 넣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무 말씀 안하시고 사인해주시고는 했다. 백만원짜리까지도 넣어 봤는데 뭐라고 안하셨다. 당신 판공비에서 지불되는거였다. 역쉬 통이 크다. 다른 중역들 한테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수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