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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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ies

군대이야기 - 논산신병훈련소

고부운 2013. 8. 8. 13:02

수용연대에서의 긴 기다림?(2주) 끝에 훈련소 29연대로 입소 했다. 정식으로 군복, 군화, 통일화, 실내화, 총기, 침투복(훈련복) 등을 지급 받았다. 구대장은 유모하사 였는데 하관이 굵어 지금의 배우 송강호 같은 인상의 충청도 사람이었다.

 

훈련소 훈련자체는어느정도 익숙했던 내용이기때문에 때문에 어렵다는 기억은 없다. 제식훈련, 각개전투훈련, 유격훈련 사격훈련, 화생방훈련 등의 내용은 이미 학교 다닐때 일주일간의 문무대(?) 입영 훈련에서 축약해서 받은 내용이었다. 문제는 살인적인 더위 였는데 유난히도 더웠던 그해 7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의 극단의 더위와 함께했다. 더위에 훈련병이 죽어나가니까 점심을 먹고나면 오침 시간을 주었다. (사상 최초로 주는 특전이라나 뭐라나. 이런 소리는 믿을 게 못된다.) 휴식시켜서 체력도 회복시키고 최고 더운 시간을 피해보자는 것이었다.

매일 입는 흙과 땀으로 범벅이된 훈련복은 일주일 내내 빨 수가 없어서 쉰내가 진동을 했다. 토요일에나 빨아서 말렸다. 온몸에 땀띠가 났다. 가슴에서 땀이흐르는 선과 어깨, 등짝 전체, 팔뚝, 손가락사이, 머리속 등 온몸이 온통 빨갛게 땀띠 땀띠 땀띠...

아무튼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고 마침내 6주간의 훈련은 끝나고 이등병이 되었다. 샛 노란 작대기 하나짜리 계급장, 군대말로 오만촉광이라고 한다.

그 날 저녁 같이 배치된 40명은 수송 열차를 탔다. 당시 군대에서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려주는 친절 따위는 없었다. 담당 인솔하사관(아마도 문관 호송관? 우리들은 죄수도 아닌데 호송관이란다.)은 열차에 타고 나서 짧막하게 강원도로 간다고만 알려주었다. 또 운도 없다. 제길헐, 강원도란다. 바라는 보안대는 커녕 인제, 원통으로 가는구나. "인제 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하는 그 인제 원통.


논산훈련소에서의 기억

껌 - 훈련 중 씹다 걸리다.

훈련병이 되면 단것이 많이 먹고 싶어진다. 오직 짠밥만 먹기에 단것을 전혀 섭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금단증상 비슷하게 단것을 찾게 된다. 나는 일과 끝나고 5분인가 10분씩 잠깐 열리는 또 한번에 하나씩 밖에 안파는 중대내 간이 PX에서 껌을 샀다. 잽싸서 늘 성공 했고 또 일요일에 극장에 가서 껌을 추가로 샀기 때문에 껌을 늘 가지고 있었다.이 껌을 훈련 중에도 몰래 몰래 씹었는데 어느 날 총검술 훈련 중에 방심하다가 담당 구대장 유하사에게 딱걸렸다. 사람 좋은 구대장은 구타하는 척 겁주다가 푸쉬업을 구령 붙혀서 100회 실시 하란다. 몸을 완전히 땅바닥에 거의 닿도록 하는게 아닌 팔이 90도정도 굽혀지면 바로 반동으로 올라오는 군대식 푸쉬업, 100회 더, 50회 더해서 총 250회 푸쉬업을 했다. 아무리 얼치기라도 군기 바짝 들어있던 그 때 아니면 있을 수가 없는 숫자다. 나 푸쉬업 250회 한 남자다.

 

황화교장 - 눈물고개

황화교장은 훈련소 영내를 벗어나서 있는 각개전투 및 사격 훈련장이다. 아침 저녁으로 엄청난 병력이 황화교장을 왔다 갔다 행군한다. 그 중간에 눈물고개가 있고 또 고속도로 위로 넘는 구름다리가 있다. 눈물고개는 교관 조교들이 꼭 이 고개에서 훈련병들에게 그 무거운 M1소총을 거꾸로 철모 위에 올려 (심할때는 철모 젖히고 맨머리 위에 올려) 총열을 손으로 잡고 오리걸음으로 고개를 넘으면서 '나실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때...' 하는 '어머님 은혜'를 부르게 하고 그 끝에 "어머니" 하고 외치라고하면 백이면 백 다 운다고 해서 눈물고개다. 눈물의 오리고개라고 하기도 했다. 터질것 같이 아파오는 허벅지의 고통에다가 머리를 파고 드는 총구의 고통이 더해지면 죽음이었다. 참 몹쓸 전통이다. 근데 난 이 때 울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시절에 나는 남자는 일생에 딱 세 번 우는거야 따위에 사로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구름다리 건너가는데 광주고속 고속버스가 서울 쪽으로 지나가는 것을 보고 울컥 했다. '아 저거 타면 집에 가는데 ...'


황화교장 - 짜장면

황화교장으로 가는 길에는 오리고개 외에 또 하나가 있었는데 바로 짜장면 집이다. 아침에 황화교장으로 행군할 때 대열에서 이탈해서 짜장면을 후르륵 마시고(ㅎㅎ) 다시 대열로 돌아오는 식으로 짜장면을 먹을 수 있다고 중대 내에 구전되어 오고 있었다. 실제로는 총까지 지급 받아서 행군하는데 대열을 이탈한다는 것은 걸렸을 때 영창에 갈지 어떨지 어떤 형벌을 받을지 모르는 엄청난 짓이었다. 어쨋든 나는 그 짜장면을 먹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황화교장을 향한 아침 행군길에 눈으로 열심히 짜장면 집을 찾았다. 전방에 짜장면집이 보이는데 마침 몇 녀석이 짜장면을 먹고난 후인지 후다닥 튀어 나와서는 냅다 앞으로 뛴다. 순간 '쟤네들이 먹었으면 나도 먹을 수 있닷!' 생각하고 재빨리 앞뒤를 살피니 조교, 교관이 안보인다. 에라 모르겠다하고 짜장면 집으로 뛰었다. 뒤에서 발자국 소리 둘이 따른다. 이런 녀석들을 군대용어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아무튼 무사히 환상의 짜장면을 먹었는데 몇 번이나 더먹었는지는 기억이 안난다. 엄청나게 무모한 짓이었는데 나는 나중에도 훈련병 신분으로 이보다 더한 짓을 ...

지금 생각해보니 교관, 조교들이 이 무모한 짜장면집 행을 알고도 방조 했다 싶다. 탈영만 집중적으로 감시하면 된다고 보고 짜장면집이 먹고 살 수있도록 늦춰준것이 아닐까?. 귀대 때는 짜장면을 먹을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던 것도 그 증거겠다. 조교 즈그덜이 일과 후 이 중국집에 가서 밥먹고 술마시고 하면서 우대도 받고 부탁조 압력도 받고했겠지. 어쩌면 그 집 딸내미가 이뻤는지도 모르지.


목욕 - 알철모 세바가지

훈련 일과가 끝나고 내무반(요즘은 생활관이라고 부른다)에 돌아오면 화장실에 다녀오고 땀과 흙으로 범벅이된 쉰내 펄펄 나는 누더기 훈련복을 벗어서 그대로 고이 접어서 관물대 맨위에 올려둔다. (다음날 다시 입는다.) 그러고는 홀딱 빨개 벗고 내피를 뺀 알철모를 들고서 기다린다. 구대장 등 기간병들이 "목욕대기!"하고 외치면 전부 내무반 문에 빠짝 붙어 서서 기다린다. 기간병이 "xx, xx 내무반, 세면장으로 뛴다. 실시" 하면 3,40명 되는 훈련병들이 알철모를 들고 복도 끝에 있는 세면장으로 냅다 뛴다. 조금 손해보면 되지 하고 뒤에 어슬렁 어슬렁 가도 되는 그런 거 없다. 세면장에 들어가면 딱 알철모 세 바가지의 물만 허용된다. 한 바가지로 땀 닦아내고 전신에 비누칠하고 두 바가지로 다시 비누 닦아내고 나면 또 한 번에 내무반으로 돌려보내고 다시 다음 내무반을 부르는 식이다. 한번에 2,3분 걸린다. 느긋하게 그런 거 없다. 미친듯이 물 붓고 비누칠하고 닦아내고 해야한다. 하루 종일 땀에 쪄들어 있었던 온몸을 씻어내고 따끔거리는 전신의 땀띠를 다독이는 유일한 기회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관이다.

아무튼,내무반에 돌아와서 물기를 닦아내고 벙벙한 군대 빤스에 희끄무레한 국방색 런닝셔츠로 갈아 입으면 시원해진 피부에 상쾌한 비누냄새에 뽀송뽀송한 빡빡머리로 기분이 잠시나마 좋아진다.

 극장

훈련소 6주면 일요일을 다섯 번 맞게된다. 이 일요일을 온종일 빈둥빈둥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훈련소에서 그럴리가 없다. 교회, 절에도 가고 극장도 가고 ... 그리고 각종 사역에도 끌려가고. 사역 많은 29연대가 그래서 무섭다. 그 평화로워야할 일요일을 망쳐놓는 사역 대마왕. 그래서 종교시설로 가거나 극장을 가는 게 좋은데 무한정의 인원을 보내주는게 아니다. 100명이 넘는 중대에 각 열명 정도씩 이었던것 같다. 내무반에 있으면 "교회, 절에 갈 병력은 중대 본부 앞으로 집합"하고 방송해서 모인 인원을 선착순으로 숫자 조정해서 보내준다. 고딩때 종교를 초탈한 내가 그런 데를 갈리 없다. 문제는 사역행 과 극장행 집합은 제대로 방송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역행 몇 명 선착순 집합'하고 방송하면 누가 나서겠나. 그래서 극장행 집합이라고 방송하고는 사역 보내기도하고 사역집합 해놓고 극장으로 보내기도 하고, 제대로 방송하기도 했다. 또 앞에서 자르기도 하고 뒤에서 자르기도 하고.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다섯번 다 극장에 갔다. '군대에서는 줄을 잘서야한다고' 했다. 앞에서 1/4~1/3 사이에 어디에 설꺼냐 뒤에서 1/3~1/4 사이 어디에 설꺼냐를 잘 결정해야 한다. 아무튼 다섯 번 다 극장행 성공은 주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거의 신기록 수준인데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줄서기말고 또 무슨 요령이 있었는지는 더 이상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극장이 좋은 점은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판다는 것이었다. 비록 냉동이 시원치 않아서 반쯤은 녹아 눅눅한 브라보콘이지만. 영화 시작하기 전에 한번 중간에 휴식시간에 한번 해서 총 두개를 사먹을 수 있다. 껌도 사고. 또 좋은 점은 감시통제의 눈초리도 없이 2시간 동안 느닷없는 침범도 받지 않고 어둠 속에 혼자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절대자유다. 비 엄청나게 오는 헌 필름에 오디오도 후지든지 말든지 또 영화 내용이고 뭐고 아무 상관 없다.


사역

훈련소에서 두 번의 사역이 내내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식당 사역

일요일 오후였는지 갑자기 기간병이 돌내무반을 돌아다니면서 무작위로 인원을 찍어서 차출했는데 거기에 걸렸다.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차출 방식이라 걸려들었다. 대, 여섯이 차출 당해서 갔는데 식당사역이었다. 오메~ 그 때부터 밤10시 점호 때까지 엄청난 강도의 노동에 시달렸다. 식재료 꺼내서 다듬고 조리하고 잠깐 식사하고 배식하고 세척까지 단 1,2초를 못쉬고 부단히 움직여야 했다. "악! 왜 내게 이런 시련이, 식당 짬밥도 전혀 사랑하지 않고 시시 때때로 염적무 몇 조각으로 밥 몇 숫가락 억지로 떠 넘기고 수시로 물만 말아먹는 내가 내가 왜?" 내무반에 돌아와서 바로 점호 받고는 죽은듯이 잤다. "쓸벌~ 내가 다시는 저딴 사역에 안 걸릴거다.... 흠냐~" 그 다음날 깨어나서도 몸이 개운치 않았다. 남들이 어렵다는 유격훈련 같은 거는 기억도 안나는데 이 식당사역은 정말 잊혀지지 않았다.

벽돌 사역

어느날 훈련을 조금 일찍 마치더니 중대 전체가 벽돌을 나르는 사역에 동원 됐다. 내 몸통만한 벽돌을 창고에서 공사현장으로 아무런 도구 없이 맨손 맨몸으로 들고 나르는 사역이었다. 벽돌 하나씩을 짊어지고 일렬로 죽 늘어져서 행진하는데 이놈의 벽돌이 어찌나 괴물이던지 무거워서 번쩍 들어 올릴 수도 없었고 그냥 들고만 있어도 팔이 빠질듯 하고 손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밀려들었다. 어떤 자세로 들던 30초를 유지하기 어려웠다. 어깨에 올리면 어깨를 송곳으로 후벼 파는듯한 고통을 준다. 온갖 자세를 다 취해봐도 답이 없다. 절망감이 밀려드는데 다들 어쩔줄 몰라하면서도 줄 행진 속도가 있으니 할 수 없이 비척 비척 앞으로 간다.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들고 어디까지 가야하는지를 모른다는데 있다. 비척 비척 가도 가도 끝이 없이 비척 비척... 지금도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래도 결국에는 그 때 그 고통이 끝나더라 하고 그 때 생각을 한다.


군가

훈련소에서 여러 개의 군가를 배웠는데 '행군의 아침'과 아주 오래된 비장한 군가 두 가지가 생각난다. '행군의 아침'은 특이하게 음정이 쉽지 않은 군가인데 지금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전문 합창단 버전으로 들으면 제법 씩씩하게 들리지만 쳐지게 부르면 조금은 처량하게도 들리는 군가다. 오래된 군가는 그 때 많이 좋아했는데 지금은 가사 곡조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찾아볼 단서가 전혀 없다. 다른데서는 전혀 들어 볼 수 없었고 부르지도 않던 아마 사라져 가는 군가였기 때문인듯 하다. 아쉽다.

 

참, 내 군번은 1288 1xxx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