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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asses

깨달음, 알음알이

고부운 2013. 4. 7. 17:43


지부지(知不知)지식이라 함은 그 의미 자체로도 하나의 훌륭한 철학적 명제이기도 하겠다. 지식의 분류에 있어서 형식지(形式知 혹은 명시지)와 암묵지(暗黙知)로 나누기도 한다.
서양사람들은 대단히 논리적이고 또 이에 대한 집착이 많다. 지식을 정의 함에 있어서 증거부족에 의한 취약점과 논리의 허점 및 거짓을 배제하는 조건과 진실과 믿음 사이에 논리적 증거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다는 서양학자들이 있었다. 이러한 조건으로는 암묵지를 다루는데 조차도 문제가 생긴다. 문서화 되지 않는 체화된 지식이 암묵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식지와 암묵지에 하나를 더하고 싶다. 지식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지식, 혹은 지식이 아닌 지식이라고 해서 지부지(知不知).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이에 속하지 않을까 싶다. 왜냐하면 깨달음이라는 것이 암묵지에 가까운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진정 암묵지인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의 분류를 더했다고 해서 카테고리 오류는 아니지 싶은 것이다.

지부지, 형용모순이나 그럴듯 해보인다. 그냥 얼핏 들은 생각 끝에 말장난이다.


깨달음
어릴적부터 활자중독이 있었다. 국민학생 시절에는 아침부터 다락방에 올라가 책을 읽다가 한밤 중에 내려와 보니 파출소에 미아신고도 하고 온동네를 찾아다니는 둥 집안이 난리였던 적도 있다. 손에 걸리는 활자란 활자는 다 읽으려고 들었다. 그게 뭔지도 잘모르면서. 고등학생 시절에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불교에 푹 빠진 적이 있었다. 임제록은 충격이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불가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에 매료되어 유마경 등 이런 저런 서적을 읽다가 결국에는 '아, 이거는 내가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구나'하고 포기하였다. 책 들여다보고 해서 알음알이를 차곡차곡 쌓아 봐야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걷지 않으면 깨달음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그리고는 역설적이게도 절집 및 대부분의 승려들에 대해서는 강한 반감과 경멸감을 가지게 되었다. 어머님이 독실한 불교신자라 절에도 가보고 스님들도 뵙고 했는데 내가 책에서 가졌던 환상들을 여지 없이 깨 주었다. 어머님께 일부러 청해서 만나본 학승에게도 경도 되지 않았다. 한국 불교 자체를 저 싯달타로부터 유래한 깨달음의 길과는 아주 먼, 너절하고 요사스러운 무당집에 다름아닌 전형적인 기복종교 장사치 집단으로 보게된 것이다. 절집의 산신각 칠성당, 불상, 나한상 등을 보며 경멸의 도를 더했다. 무심한 불상에다 대고 돈내고 손 비벼가며 소원 비는 사람들을 보면 적극 나서서 말리고 싶은 유혹까지 들었다. 내가 책을 통해 이해하는 불교란 우선 복달라고 비는 '종교'가 아니고 깨달음을 다루는 철학이요 부처(싯달타)는 경배해야할 신이 아니고 깨달음을 얻고 그 길을 열고 가르쳐준 선배로써 존경의 대상이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33천 이 어떻다고? 장명등, 49재, 천도재, 산신당, 칠성각 등등의 수 없이 많은 자기 부정의 증거를 품고도 창피한 줄도 모르는 뻔뻔한 엉터리 절집에서 무슨 놈의 고승대덕이 나온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경멸은 세월이 흘러 불교를 그냥 하나의 세속적인 종교로 보게되면서 점차 줄어들었다. 기대하는 게 없으니 실망도 없는 게다. 또 요즘 산에라도 갔다가 지나치는 절에서는 내가 그리도 싫어했던 산신각 칠성당 같은 것들은 못본 것 같다. 그런 게 있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다. (산신각 칠성당 같은 게 남아 있는데도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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